plastic world: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세계
플라스틱은 열이나 압력을 가해 일정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고분자 화합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생겨난 지 150년도 되지 않는 이 재료는 편리한 가공성, 낮은 가격, 탁월한 소재 특성으로 인해 금속, 석재, 나무와 같은 고전적인 재료를 빠르게 대체해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하는 필름, 합성섬유, 병, 튜브, 장난감 등 거의 모든 생활용품부터 고내열, 고강도 재료를 요구하는 각종 장비에 이르기까지 플라스틱은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인류의 역사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지나 현재 플라스틱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플라스틱 제품의 폭발적인 사용량만큼 버려지는 양도 많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사용되는 수많은 일회용품들은 거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너도나도 편리하게 쓰고 쉽게 버리고 있다. 아무리 분리배출을 잘 한다고 해도 재활용되는 플라스틱은 9%에 불과하다고 한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땅에 묻어도 썩지 않고, 태우면 다이옥신이나 염화수소 같은 가스를 뿜어내며, 바다로 떠내려간 플라스틱 쓰레기는 거대한 섬을 만들거나 미세플라스틱으로 바다생물의 몸에, 그리고 인간의 몸속에 다시 도달하게 된다. 최근 기후위기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의 시각에서 인간이 만들어내고 배출하고 있는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김승현은 이렇게 쉽게 쓰고 버려지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플라스틱 재료를 가지고 ‘플라스틱 세계’를 만든다. 플라스틱을 다루되 직접적으로 환경문제를 말하거나 에코아트를 시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작가의 거주지 주변 재활용 분리수거장에서 버려진 것들(things)을 주워와 이리저리 이어붙이고,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간직해 온 피규어들이나 작은 오브제들을 ‘재활용’(recycling)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만든 ‘플라스틱 세계’를 단순히 작품재료를 가리키는 용어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김승현은 오히려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이 가진 내재적 성질, 특정한 물성에 집중하여 작품을 제작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플라스틱의 성질을 ‘플라스틱성’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와 질감으로 광범위하게 편재되어 우리 눈에 띄지 않는 ‘지각불가능성’(imperceptibility)을 가지며, 자연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무한 ‘증식’(proliferation)하고, 이 지구상 생태계에 ‘축적’(accumulation)된다는 속성을 갖는다(Heather Davis, “Impercerptibility and Accumulation: Political Strategies of Plastic”, in: Camera Obscura, vol. 31, no. 2(2016), pp. 186-193). 우리는 김승현의 작품에서 이러한 플라스틱성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보통 쉽게 지나쳐버리는 사물들, 수명을 다해 버려진 사물들이 김승현의 플라스틱 세계에는 각각의 자리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이들이 미세플라스틱처럼 땅에 파묻어도 바다에 떠내려 보내도 돌고 돌아 다시 우리 몸에 축적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면, 오히려 이들과 ‘낯선 동맹’을 맺어보자고 제안한다. 이 낯선 동맹의 방식은 우리가 다시 plastic이란 단어의 다른 뜻에 주목할 때 더 잘 설명된다.
plastic world: 마음대로 변형가능한 세계
plastic이란 형용사는 어떤 힘을 가했을 때 쉽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성질, 즉 가소성(可塑性)이 좋음을 뜻하기도 한다. 진흙과 같이 쉽게 모양을 빚어낼 수 있는 물질에도 plastic이라는 성질을 붙인다. 그래서 각종 재료를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어내는 예술, 조형(造形)예술을 ‘plastic arts’로 표기한다.
김승현은 예술이 갖고 있는 이러한 조형성(plasticité)을 자유자재로 빚어내는 데 강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위장 Camouflage> 연작에서는 투구 위에 작은 피규어들을 한껏 집적하는 방식으로 본래보다 더욱 위협적인 형상들을 만들어냈다. <가려진 나, 가리는 나 Camouflaged> 연작에서는 얼굴 사진 위에 각종 오브제 사진들이 붙고 연결되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자라나거나, 실제 버려진 사물 오브제들이 연결, 접속되며 나의 얼굴을 완전히 대체하는 방식으로 연출되었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의 관점에 따르면, 동물이나 곤충들에서 나타나는 변장(disguise), 위장(camouflage), 위협(intimidation)과 같은 미미크리(mimicry, 擬態) 행위는 인간의 미메시스(mimesis), 즉 그림 그리는 행위와 유사점이 있다. 굳이 생존 투쟁의 이유가 아니어도, 하등동물과 곤충, 그리고 인간은 자신을 다른 것처럼 보이도록 자신의 겉모습을 디자인한다는 것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그림을 저 멀리서 나를 응시하는 힘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로 규정하며, ‘진짜 나’와 ‘가짜 나’의 분리 현상까지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승현의 이전 작업들은 작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피규어 장난감이든, 작가의 현재 삶을 둘러싼 수많은 버려진 물건들이든, 사물들로 구성된 ‘가상의 나’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2022년 청주창작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낯선 우아함> 작업에서 작가는 ‘가짜 나 만들기’ 또는 ‘진짜 나 가리기’에서 벗어나 진짜든 가짜든 ‘나’를 이루고 있는, 나와는 이질적인 ‘사물’로 직접적인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얼굴과 인접하거나 덧대지면서 인간+사물의 혼종의 양상을 보였던 것들(things)이 이제 독립적인 하나의 표현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플라스틱 세계에서 모든 사물이 원래 형상 그대로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김승현은 원재료가 갖고 있는 형상에서 다른 형상이 솟아나도록 외부에서 힘을 가한다. 덧붙이거나 분리하는 힘이 가해졌을 때, 플라스틱과 같은 재료들이 갖고 있던 잠재적 형상은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번 <낯선 우아함> 작업은 작가가 밝히듯 “빗자루로 원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빗자루는 원래의 길고 뻣뻣한 성질을 버리지 않고도 거대한 원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관객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초록색 빗자루 원에 압도당하면서도 기이하고 낯선 느낌을 받는다.
plastic world: 인공적 조형의 세계
이 기이한 낯섦은 우리가 알고 있던 사물의 ‘용도변경’에서 비롯된다. 빗자루와 먼지떨이와 같은 청소도구들 본래의 용도는 쓰레기나 먼지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아무리 화려한 형형색색을 띠고 있더라도 그 임무를 다하면 우리의 관심과 시야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물들의 지위는 오랫동안 그렇게 취급되어 왔다. 사물은 인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인공적 사물을 자연의 성질과 비교할 때는 불순물이 섞인 합성물로 저급하게 여겨진 것이다. 특히 인간을 위해 사용된다는 ‘도구성’이 사라지게 되면 더 이상 사물은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대로, 도구존재로서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도구성을 상실한 예술작품 안에서이다. 도구가 더 이상 도구로 기능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물이 거기에 있음을 지각하고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낯선 우아함》전에 등장한 빗자루들은 빗자루질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형태와 색채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벽에 부착되어 크리스마스트리가 되기도 하고, 허공에 매달려 태양을 향해 달려가는 유동적인 흐름(flux)이 되기도 한다. 먼지 하나 묻히지 않은 먼지떨이는 천정에 고정되어 샹들리에가 되기도 하고, 시멘트 벽에서 피어나는 알록달록한 꽃봉우리 형상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용도변경’이 실제 다른 도구성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플라스틱 세계 안에서 폭신한 샹들리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으며, 오색찬란한 꽃에서는 향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빗자루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또 다른 형상들을 상상하는 놀이에 동참한다. 작가가 디지털 평면 작업을 통해 다양한 생성의 지도를 그렸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인공적 조형물을 생성해내는 과정에서 도구들은 부품별로 분리되거나 해체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의 탄생에 기여하지 못하고 남겨진 조각들마저 버려지지 않고 다시 그대로 ‘오브제 태피스트리’의 형태로 벽에 부착된다. 부품들은 조각조각 떨어진 상태에서 더 자유롭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듯하다.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형상을 조직적으로 만들어나갈 때와 달리,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인 조각들은 옆에 있는 다른 재료 조각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작가는 인간의 망각 속에 놓여 있거나, 인간의 도구성에서 벗어나 있거나, 혹은 인간에게 폐기된 사물들이 고유의 목소리와 모습을 드러내도록 의도하고 있다.
plastic world: 아름다운 사물의 세계
다양한 형상들(figures)이 집적되고(assemblé), 이접되어(disjuncté) 솟아나는 또 다른 형상(Figure)은 우리에게 기이하고 낯선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프랑스어로 plastique이라 하면 ‘멋진, 아름다운’의 뜻도 있다. 이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오래 전 언캐니(uncanny) 이론에서 설명했듯, 기이하고 낯선 것이 우리에게 매혹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안에 내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승현의 플라스틱 세계에서 인간 얼굴이 줄줄이 사물을 낳는 장면에 마음이 끌려도, 싸구려 키치스러운 일상용품이 위대한 숭배의 대상처럼 성큼 다가와도 놀랄 필요는 없다. 김승현 작품의 ‘매혹’이 말하는 것은, 플라스틱 시대의 플라스틱 세계에는 인간과 사물이 위계를 설정하지 않고, 서로 동맹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특이한 동맹관계는 역설적으로 사물들이 인간을 인간되게 만들었으며 그것들이 인간을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김승현의 플라스틱 세계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사물들의 예술 표현의 가치를 드러내 보여주며, 인간에 의해 버려지고, 무용한 것이라 여겨진 것들, 망각된 것들의 미학을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