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현존의 아상블라주: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진동하기
김보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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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은 일상 사물이나 이미지를 모아서 쌓는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대신 본래 있는 것을 조합하여 형태를 구축하고 섬세하게 조율한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제작보다는 조립 또는 배치에 가깝다. 미술사적으로 아상블라주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콜라주를 확장한 개념인 아상블라주는 1950년대 중반 이후 부활한 다다(Dada), 다시 말해 네오다다와 누보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의 방법론을 가리킨다. 상품이 넘치는 소비자본주의를 경험한 첫 번째 세대였을 당시의 미술가들은 아상블라주를 통해 일상과 예술의 결합을 추구하고 전후추상의 주관적 미학을 넘어서고자 했다.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밝힌 바대로 저자성(authorship)이라는 개념이 극복되면 예술가는 공동 생산물의 수집가(collector)가 된다(부리오, 2022: 97). 부리오가 이미 2000년대 초 저서에서 썼듯이 전 지구적 과잉생산 생태계에서 예술가는 DJ 혹은 웹 서퍼처럼 활동한다. 김승현 역시 부리오가 말한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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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평범한 사물이나 이미지를 집적하여 입체·설치와 평면 작업으로 구현하는 김승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 발견술이다. 작품에 대형 빗자루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계기도 발견의 순간에서 비롯되었다. 작업실에 세워져 있는 플라스틱 빗자루가 불현듯 시선을 붙든 것이다. 늘 일상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빗자루가 초록빛을 발하는 듯 강렬히 다가온 그 날 이후 작가는 빗자루, 먼지떨이 등 청소 용구를 모아 <Circle>과 <Plastic World> 연작을 진행하기에 이른다([그림 1]). 그런가 하면 2023년 작품부터 등장한 조화(造花)는 작업실 인근 추모공원에서 발견한 오브제다([그림 2]).
대형 플라스틱 빗자루를 작품에 처음 도입한 사례로 《강원키즈트리엔날레2020》 출품작을 들 수 있지만, 주요 재료로 활용한 것은 2021년부터다. ‘빗자루로 원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는 개인전 《낯선 우아함(Unfamiliar Elegance)》(2021)의 설치작업을 통해 우리는 매일 사용하는 물건의 색채와 형태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작가의 접근 태도를 확인한다. 일상 사물을 작품에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승현은 개념미술의 선구자 뒤샹의 후예다. 그러나 미적 구성과 조합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뒤샹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뷰에서 작업 과정 중 장소 특정성에 대한 고려보다 오브제 자체의 형태와 색채의 구성에 비중을 두는 편이라고 밝힌 작가의 발언은 비평가 핼 포스터(Hal Foster)가 사라 제(Sarah Sze)의 작품을 분석하며 ‘site-sensitive’라고 평한 내용을 연상시킨다. 포스터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와 사라 제를 비교하면서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인 세라의 조각에 비해 작품이 위치한 장소에 적응하면서도 그 안에서 절반은 자율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제의 구축물들은 장소에 민감하다고 보았던 것이다(포스터, 2022: 209). 제와 유사하게 김승현은 자체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공간에 어우러지는 작업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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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이 사물을 집적하는 방식을 시작한 시점은 2017년 일본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바닥에 놓인 거대한 사무라이 투구 형상을 수많은 인형으로 덮은 작품과 인형을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게 쌓아 올린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인형으로 가려진 투구 앞에서 감상자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장식 일부를 통해 투구의 전체적 형태나 크기를 가늠하는가 하면 소소한 힘들이 모여 거대 권력을 압도하는듯한 통쾌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탑처럼 쌓인 또 다른 인형 설치 작품도 작은 것이 모여 형성하는 커다란 힘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앞의 작업과 상통한다. 그러나 동시에 뜯겨 나온 솜과 인형이 엉켜있는 모습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작품의 주재료인 인형에 담긴 시간성을 전달하면서 내부에 숨겨져 있던 것이 겉으로 드러나 버린 역전의 현상을 제시한다. 작가가 오랫동안 관심 가져온 은폐와 노출이라는 주제의 구현이다. 김승현의 오브제 설치작업에서 보이는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 강렬한 에너지로, 은폐와 노출, 집중과 확산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방향성을 통해 긴장감이 유지된다. 다시 말해 수렴을 통해 응축되는 힘과 생생하고 활기차게 뻗어 나가는 힘을 동시에 보여준다. 대비를 이루는 표현은 그동안 김승현이 작성한 작가 노트나 작품 제목에서도 발견된다. 구체적 예로 제목에서 확인되는 ‘camouflaged’와 ‘revealer’, ‘가장’이나 ‘치장’과 ‘드러냄’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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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나 먼지떨이, 조화로 구성된 형태는 어디론가 향하는 방향성을 지닌 채 휘몰아쳐 나아가거나 힘있게 수직 상승하는 구조로 제시된다. 여러 개의 오브제가 합쳐서 강력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빗자루들이 모여 한 방향으로 향해 가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팔을 뻗고 있는 강한 염원을 담은 인간 형상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전시 《낯선 우아함》(2021)에서 벽에 걸린 반구 형태를 향해 위로 솟아오르는 빗자루들이 이어졌다면([그림 3]), 작품 <plastic world: circle>(2023)에서는 전시장 출입구를 향해 빠져나가려는 먼지떨이의 긴 행렬이 보인다([그림 4]). 9 미터에 달하는 움직임의 형태는 일찍이 화가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가 우아함의 표현으로 주목했던 사행선(蛇行線)을 그리며 나아간다. 그런가 하면 동부창고 설치작업인 <Plastic World>(2022)의 경우 빗자루들이 천장 중앙의 원형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다([그림 5]). 이렇듯 바닥의 원형에서 위로 솟아오르고, 원형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거나, 원형을 향해 가는 힘 있는 구성을 통해 작가는 일상의 미미한 물건을 일으켜 세우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말 그대로 ‘사물들의 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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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생동하고 유동적이며 잠재적이다. ‘대상’이 고정된 것으로서 나타나는 이유는 그것들의 되기(becoming)가 인간이 식별할 수 없는 수준과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공간의 연장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물질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강도라는 비실체성과 변별성의 개념을 갖고 살아가는 일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살아가기 위해 인간은 세계를 일련의 고정된 대상들로 환원시켜 해석해야 하고, 이러한 부분이 물질적이라는 단어에 할당된 수사학적 역할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베넷, 2020: 150~157). 그러나 김승현은 이 방향성을 뒤집는다. 말하자면 고정된 대상에 흐름을 부여하고 사물이 가능한 힘 있게 발화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평범하고 낯익은 사물이 ‘낯선 우아함’의 형태로 탈바꿈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김승현에 의해 활력이 더해진 사물은 다시 인간에게 생기를 전달한다.
미술비평가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은 “출구 없음: 레디메이드와 비디오(No Exit: Video and the Readymade)”(2007)에서 레디메이드의 계보학을 고찰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물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object)’를 제시한 뒤샹 이래로 레디메이드 그림을 손으로 그린 재스퍼 존스의 ‘행위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action)’, 전자와 양성자를 조작한 백남준의 ‘네트워크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network)’가 이어진다. 나아가 조슬릿은 ‘일종의 인간 레디메이드’의 등장을 예견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Joselit, 2007: 37~45 참조). 나는 조슬릿의 논의에 기대어 김승현의 작업을 ‘퍼포먼스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performance)’ 또는 ‘행위주체성으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agency)’라고 칭하고자 한다. 빗자루나 먼지떨이 등으로 구성된 설치를 통해 사물에 수행성(performativity)을 부여한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태양처럼 보이는 원 형태를 향하거나 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대한 선형은 생명체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기획전시 《재생버튼(Re: play)》 서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버려진 것들을 쓸어내는 대신 공중 곡예를 넘듯 군무를 펼치는 플라스틱 청소도구들”이라는 언급 역시 김승현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징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전의 <Camouflage> 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주제와 형식 면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수평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엿보이기에 ‘행위주체성으로서 레디메이드’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김승현의 작업 속에서 자연과 문화, 인간과 사물을 가르는 이분법은 희미해진다. 인간과 다른 물질성 사이의 관계를 보다 수평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보다 생태학적인 감수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베넷, 2020: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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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승현이 입체와 평면을 오가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화가 에이미 실먼(Amy Sillman)이 작업실을 이원화하여 캔버스 회화를 위한 스튜디오와 디지털 애니메이션 작업 공간을 오가는 것처럼 김승현의 작업실도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오브제를 활용한 입체 설치를 위한 공간, 다른 하나는 평면 작업을 위한 공간이다. 예전부터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종이에 펜이나 아크릴로 다양한 드로잉을 진행해왔다. ‘디지털 콜라주’ 작품은 202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의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조합하여 이루어진다. 포토샵 프로그램을 통해 스케일과 색상 변환 과정을 거치는데, 이를테면 작품 <Circle-002>([그림 6])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록 빗자루들이 핑크색으로 전환되고 크기가 축소되거나 허공에 흩어져 있으며 그림자가 더해져 공간감을 창출하기도 한다. 사각형 프레임 안에 제한된 작업이지만 컴퓨터 처리 과정을 거침으로써 실제 공간 설치에서보다 오히려 더 자유자재로 변경, 배치될 수 있는 표현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빗자루인가? 일찍이 <부러진 팔에 앞서(In Advance of the Broken Arm)>(1915/1964)라는 제목으로 제설용 삽을 선보인 뒤샹 이후 청소도구를 레디메이드로 제시했던 몇몇 작품이 떠오른다. 김구림의 <빗자루와 걸레>(1969)나 김범의 <무제(지평선 위의 업무)>(2005) 작업이 그 대표 사례다. 물론 김승현의 작업은 사물의 조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아무런 가공 없이 여러 개를 집적시켰다는 점에서 앞선 작업들과 뚜렷한 차별점을 지닌다. 오브제 선택의 기준에 대한 질문에 작가는 특별한 의도는 없다고 답했지만 최근작에 도입되고 있는 빗자루, 먼지떨이, 쓰레받기, 조화 등은 이른바 미화(美化) 활동에 쓰이는 인공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그림 7]). 어딘가를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서 또는 무언가를 꾸미는 데 사용하는 물건이면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인 것이다. 작가는 무엇보다 우리나라 공산품의 선명한 색상에 끌린다고 했다. 2019년 개인전 《가려진 나·가리는 나 camouflaged》에서 제품을 감싸고 보호하는 포장 상자가 작품의 소재로 쓰인 바 있다면([그림 8]), 최근 작업에서는 지저분한 것들을 제거하고 먼지를 벗겨내는 데 사용되는 청소도구가 오브제로 선택되고 있다는 차이점이 보여 흥미롭다. ‘메시지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가리는 방법보다는 드러내는 쪽을 택하여 그 의미를 더하고 싶다’라고 했던 작가의 입장이 암암리에 투영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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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줄곧 일상 사물이 지닌 형태와 색채에 대한 본인의 관심을 밝히고 있지만, 오브제에 담긴 심리적 의미는 없을까? 뚜렷한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오브제 선택에 있어 무의식이 작동하지 않았을지 궁금해진다. 지금까지 작업에 활용해온 인형, 투구, 청소도구, 조화 등을 떠올려볼 때 감상자로서 그 숨겨진 의미를 헤아려보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위니코트(D. W. Winnicott, 1896~1971)에 의하면 예술은 항상 다른 무언가를 대신하는 이행 기능(transitional function)을 수행한다. 위니코트의 이론에 따라 김승현 역시 자신과 연관된 물건을 오브제로 선택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폴리우레탄으로 덮은 착종된 이미지를 제시한 <Camouflage> 시리즈는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페르소나’ 개념, 즉 사회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나 외적 자아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렇듯 김승현의 작업에서 물질은 자아의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며 내외부를 넘나든다. 물질은 자아의 안과 밖에서 작동하는 생기(vitality)로 간주할 수 있다(베넷, 2020: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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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재료를 대하는 예술가의 진실하고 열정적인 태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 193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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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 2021년 이후 오브제 설치작업에서 확인되는 무엇보다 큰 변화는 사물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승현은 이전 작업인 <Camouflage> 또는 <Camouflaged> 연작에서 이미 장난감, 플라스틱 용기 등 일상 사물을 집적시키거나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했으나 대부분 금색이나 은색 우레탄 안료로 덮어 오브제를 은폐했다([그림 9]). 그에 비해 빗자루, 먼지떨이 등을 활용한 최근작에서는 재료를 날 것으로 노출한다. 형태를 구축하기 위해 일종의 뼈대로 활용되는 각목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거대한 원형 또는 원형을 향해 맹렬하게 나아가는 힘 있는 선적 구성을 보여줄 뿐,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대로 ‘가리는 방법보다는 드러내는 쪽’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진실스럽다(Beauty is truthy)”(모튼, 2023: 59)는 의미일까. 전체적으로 보아 꾸밈으로부터 벗어나 실제 자체로, 구심적 형태로부터 원심적 배치로 향해 가는 변화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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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전 <Camouflage> 연작에서부터 보이는 일관된 특징은 인간과 사물을 연결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대등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예를 들어 콜라주 작업 <Camouflaged 008>(2019, [그림 10])은 인물 사진에 구두, 가방, 갓난아기 사진을 접합한 것이다. 자동차, 반지, 화장품으로 덮인 인물 머리 위로 구두와 아기가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간다. 김승현의 이미지 조합은 또한 부리오가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형식이자 내용이며, 주체이자 객체이고, 자연이자 문화인 전체성 속의 물질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말한 내용과도 연결해 볼 수 있는 것이다(부리오, 2023: 47). 주체를 환경과 독립된 자율적 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경계가 조금이라도 침해당할 때 그 무엇도 자아의 완전한 해체를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확립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인간을 분산 시스템의 일부로 보면 인간 역량의 완전한 실현이 접합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접합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주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발적이고 의식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으며 혼돈스러운 세상과 동떨어진 지배와 제어의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나와서 그 세상과 통합된다(헤일스, 2013: 508~509).
“내가 해야 할 일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말하는 김승현에게 예술은 무엇보다 변환을 의미한다. 그는 시선과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일상용품을 미적 오브제로, 소소한 사물을 거대한 집적물로, 보잘 것 없는 대상을 강렬한 에너지 덩어리로 바꾼다. 미미한 사물이 응축 또는 확산의 형태로 합쳐져 어떻게 힘을 발휘하게 되는지 ‘역전이 주는 즐거움’(작가 노트)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동안 ‘위장’이란 주제에 천착했던 그는 일상 오브제의 색과 형태 자체에 집중한 ‘플라스틱 세계’로 이동했고 이제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단계다. 오브제 설치와 디지털 평면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김승현은 전 지구적 전염병 이후 많은 활동이 급격하게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진 상황에서도 물성이 갖는 매력과 물리적 공간에서의 신체 경험을 간과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는 자아와 사물,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예술의 본질과 조형에 대한 탐구를 이어갈 것이다. 열정적 도전 정신의 작가 김승현이 전개할 ‘현존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of presence)’를 기대한다.
2024, 김보라
참고문헌
모튼, 티머시(Morton, Timothy). 2023. 『생태적 삶』. 김태한 옮김. 앨피.
베넷, 제인(Jane Bennett). 2020.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연구.
부리오, 니콜라(Nicolas Bourriaud). 2016. 『포스트프로덕션』. 정연심·손부경 옮김. 그레파이트 온 핑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2. 『엑스폼』. 정은영·김일지 옮김. 현실문화연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3. 『플래닛 B. 기후 변화 그리고 새로운 숭고』. 김한
들·노태은·안소현 옮김. 이안북스.
포스터, 핼(Hal Foster). 2022. 『소극 다음은 무엇?』. 조주연 옮김. 워크룸프레스.
헤일스, 캐서린(Katherine Hayles). 2013.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허진 옮김. 플래닛.
정은영. 2023. “재생버튼: 폐기된 존재들의 귀환을 위한 리-플레이”. http://www.kwanhoongallery.com/?c=exhibiton&s=2&syear=2023&gp=1&gbn=viewok&ix=232(검색일: 2023.11.25).
Joselit, David. Winter 2007. “No Exit: Video and the Readymade.” October 119, pp. 37-45; 「출구 없음: 비디오와 레디메이드」. 김영인 옮김. http://tigersprung.org/?p=2066(검색일: 2023.11.20).